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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AL GUIDE

진천 김유신탄생지와 태실

이 곳은 홍무대왕 김유신(595~673)이 탄생한 곳으로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13손이다.

김유신 장군은 만노군 태수(萬弩郡 太守, 만노 : 진천의 옛이름) 김서현(金舒玄)장군의 아들로 진평왕 17년(595년) 진천읍 상계리 계양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나이 15세 되던 609년(진평왕 31년)에 화랑이 되고 낭비성 싸움에 공을 세워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 선덕여왕 때 상장군(上將軍), 무열왕 7년(660년)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당군(唐軍)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후 나당연합군의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668년)하고 태대각간(太大角干)이 되었으며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다시 찾아 삼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여 흥무대왕 으로 추봉되었다.

지금의 계양(桂陽) 마을 입구에 장군터(태수 관저가 있던 곳)라 불리워지는 곳에 1983년에 유허비(遺墟碑)를 건립하였으며, 이 곳에서 북동방향 300m 지점에는 태수 관저에서 사용했다는 우물터 연보정(蓮寶井)이 현존하고 있으며 무술 연습과 말달리기를 했다고 전해오는 치마대와 태실은 해발 461.8m의 산정상에 원형으로 석축이 있고 그 주위에 경사면을 에워싼 길이 216m, 높이 1-1.3m규모의 석축이 산성처럼 드리워져 있으며, 우리 나라 태실의 최고형식에 속하는 중요 유적이다.

진천 길상사

진천 길상사 는 진천 도당산에 있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흥무대왕 김유신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충청도(忠淸道)에 "신라진평왕시(新羅眞平王時) 만노군태수(萬弩郡太守) 김서현지처만명(金舒玄之妻萬明) 임신20월생자(妊宸20月生子) 명왈유신(名曰庾信) 장태어현남15리(藏胎於縣南十五里) 화위신(化爲神) 인호태령산(因號胎靈山)자신라시(自新羅時) 치사우춘추강향행제(置祠宇春秋降香行祭) 고려인이불혁(高麗因而不革) 본조태종무인(本朝太宗戊寅) 영소재관행제(令所在官行祭) 속칭태산(俗稱胎山)"이라하여 신라(新羅)때부터 장군의 태(胎)가 묻힌 태령산(胎靈山) 아래 사당을 건립하고 국행제(國行祭)를 지내오다가 조선태종(朝鮮太宗)때부터 관행제(官行祭)로 치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진천 석장리 유적

진천군 덕산면 지역은 미호천 상류에 형성된 충 적지대로 노령화된 낮은 구릉지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유적은 덕산면 구산리, 석장리, 기전리 등 인접된 세개의 마을에 걸쳐 있는 해발 105.2m의 야산에 북족으로 흘러내린 완만한 구릉의 서쪽 사면에 자리하고 있다.

발굴지역에서 모두 38기의 철 생산 또는 철제품 제작활동과 관련된 노적이 확인되었으며 노의 내벽과 바닥면의 구조는 고대 제철로의 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유적은 낮은 구릉의 작은 골짜기를 이루는 경사지를 이용하여 한정된 공간에 다양한 노적이 밀집해 있었다. 또한 제련에서 단야까지 일련의 공정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규모와 형태에 있어서도 장방형의 대형 상형로를 비롯하여 원형로, 방형로, 장방형로 등 다양하게 조사되었다.

노의 구조적인면에서는 경사지를 이용하여 간단한 기초시설을 한 지하식과 반지하식이 확인되었다. 특히 A-4, 8, 9호와 B-4, 5호 노에서는 외곽에 ㄷ자형의 구덩이를 파고 그 내부에 노를 축조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연대는 노적과 동일한 시기의 퇴적층에서 출토된 고배, 개배등 토기류를 통해볼 때 대체로 3세기터 5세기까지 이 지역에서 장기간에 걸쳐 철 생산활동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진천 이상설 생가

독립운동가 이상설(1870∼1917) 선생이 태어난 생가로 목조초가집으로 안채와 헛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선생은 현 가옥에서 학자이신 이행우의 아들로 태어나 189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교수, 한성 사범학교 교관 등을 역임하면서 영어, 프랑스어 등 7개국어를 구사하여 신학문을 깨우쳤다.

1904년에는 보안회의 후신으로 대한협동회를 조직하여 민족 운동을 하였으며, 탁지부 재무관 법부협판을 거쳐 1905년에는 의정부 참찬에 발탁되었다.

같은 해인 11월7일에 수옥헌에서 이또 주재하에 대신회의가 강제 개최되어 이완용 박제순등의 찬성을 조약체결을 선언하였는바 선생은 대신회의에 실무 책임자임에도 일본군의 방해로 참석하지 못하고 다음날 새벽에 알게되어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통일대탑보탑사

진천읍 상계리 연곡리는 삼국시대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지대로 상계리 계양마을의 담안밭에 흥무대왕 김유신의 탄생지가 있으며 만뢰산에는 태령산성 , 만뢰산성이 있고 고려시대 큰 절터로만 전해오던 연곡리 비립동에 고려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404호인 백비가 논 가운데 있던 것을 정화하여 비각을 세워 보탑사 경내에 보존하고 있으며 연곡사지와 관련된 3층석탑이 있다.

1991년도 고건축 문화재 팀이 이곳을 답사하고 신영훈 문화재 전문위원의감독아래 1992년 5월에 보탑사를 착공하여 건축하였으며 1층에는 심주를 중심으로 사방불을 모시고 2층에는 경전을 모시고 3층에는 미륵3존불을 모셨다.

진천 농다리

구곡리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 놓여진 특이한 양식의 옛 다리이다.

사력 암질의 붉은 돌을 쌓아서 만든 다리로써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긴 옛 다리이다. 사력암질의 붉은색 돌을 쌓아 축조한 다리로서 당초 28수를 응용하여 28간의 교각을 만들고 그위에 길이 170cm 내외 넓이 80 cm, 두께 20 cm 내외의 장대석1 개를 얹어 만들었다. 총장 93.6m, 폭 3.6m, 교각 1.2m 이며 교각사이의 폭은 80 cm 내외이다. 석회등을 바르지 않고 그대로 쌓았는데도 견고하며 장마가 져도 유실됨이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진천 정송강사

진천 정송강사는 송강 정철선생(1536∼1593)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지방기념물 9호이다.

선생의 묘소는 원래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에 있던 것을 현종6년(1665)에 우암 송시열이 지금의 묘소로 자리를 정하고 그의 후손 정양이 이장하여 사우를 창건하였으나 규모가 작아 1979년에 전면 신축정화하였다. 사당은 목조19평 맞배지붕이고 유물전시관은 시멘트32평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경내에는송강묘소와 신도비가 있으며 송강선생의 은배, 옥배 그리고 연행일기65일분과 친필편지 등이 보관, 전시되어 있다. 송강사(1976년 지방기념물 9호로 지정) 왼쪽에는 마른 억새풀이 우거진 오솔길을 3백여m타고 오르다보면 송강의 묘소가 나온다.

진천 배티성지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노고산 아래 위치한 배티성지는 많은 순교자의 종교정신을 기리고 기도하는 장소와 피정의 집으로 활용되었으나 십자가와 묵주만이 남아 천주교 박해의 정도를 가늠케한다.

동네어귀에 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란 말이 생겨났고 이것이 순수한 우리말로 배티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조선 영조때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을 때 백곡을 지나다 이 마을 노인 이순곤이 이끄는 주민에게 패한 뒤 다시 안성쪽으로 향하다 오명황이 이끄는 관군에게 진압 패전하였다는데서 패치라 불리우다 바뀌었다는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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